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안회남은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髮)>이 3등으로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흔히 신변소설 작가로 불릴 만큼 작품의 상당수가 유년 기억과 일상생활을 매개로 한 것이다. ‘연애 이야기’, ‘가난한 이야기’, ‘결혼 이야기’, ‘아내 이야기’, ‘동무 이야기’, ‘선친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나’가 장티푸스에 걸린 친구의 아내를 애인과 함께 간호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연기(煙氣)>(1933), 아내의 상자에서 패물을 몰래 꺼내어 전당포에 맡긴 후 죄책감으로 방황하는 내면을 그린 <상자>(1935), 연작 형식으로 1936년에 잇달아 발표된 <악마>, <우울>, <고향(故鄕)>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작품은 모두 어린 시절 동무들과의 아스라한 기억을 생생하게 재현하거나 가난과 궁핍으로 점철된 작가의 사실적 체험들을 뚜렷하게 부조한다. 그중에서도 <겸허>는 작가의 휘문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자, <봄봄>, <동백꽃>의 저자로 유명한 김유정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937년 1월 ≪조광≫에 발표된 <명상>은 ≪금수회의록≫과 ≪공진회≫의 작가이자 그의 아버지인 안국선에 대한 추억과 회고의 내용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데뷔 시기부터 안회남은 작가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일제강점기의 굴곡진 삶을 환기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창작했다. 이제까지 한국 근현대문학사가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신변소설 작가(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로 박태원과 함께 안회남을 꼽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안회남의 소설은 분명 신변소설, 자서전적 소설, 또는 ‘수필 형식으로 변형된 소설’ 등으로 규정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밝힌 바 있다. 즉 ‘나의 신변문학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식민지 정책에 쫓기어 자기 자신 속으로만 파고들어 간 문학’이라는 것이다.
해방 직전 충남 전의에 머무르고 있던 안회남은 1944년 그곳 농민들과 함께 일본 탄광으로 끌려간다. 그 비극적인 징용 체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후에 나온 창작집 ≪불≫은 이 체험을 형상화한 책이다. 이 소설집을 계기로 안회남의 소설은 기존의 창작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을 강화해 나간다. 이 시기 그의 소설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주제와 형식 측면에서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이른바 ‘징용 문학’으로 일컬어지는 <불>을 비롯한 그의 몇몇 소설들은 징용이라는 독특한 체험을 소재로 현실 인식의 확산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방 후 안회남의 문학은 시대적 현안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주의 관점에서 민족적 모순과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해 저항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해방 이후에 발표된 그의 많은 작품들, 가령 <불>, <쌀>, <소>, <사선(死線)을 넘어서> 등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이 시기 그의 소설은 초기 작품이 지녔던 한계를 나름 극복하고 민족적 아픔과 혼탁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며 현실 비판적인 작가 의식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200자평
≪금수회의록≫을 쓴 신소설 작가 안국선의 아들 안회남(본명 안필승). 그 역시 소설가였다. 주로 신변소설을 많이 써서 해방 이전 문학가들 가운데 빛을 덜 본 감이 있는 작가. 그가 썼던 일제강점기 생활 주변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지은이
안회남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필승(必承). 신소설 작가 안국선의 외아들로 잘 알려진 그는 수송보통학교를 수료하고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휘문고보에는 소설가 김유정이 수학하고 있었다.
1926년 안국선이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집안 사정 등으로 인해, 다음 해 12월 학교를 중퇴했다. 학업을 중단한 후 개벽사에 입사하여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근무한다. 이후 여러 잡지사와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충남 전의로 이사 간다.
1944년 9월, 충남 연기군 농민 133명과 함께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탄광으로 징용돼 끌려갔다가, 1년 후인 1945년 9월 26일에 귀국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에 가입한다.
특히 1945년 12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합쳐져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할 때, 소설부 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
1946년부터 미군정이 남로당 계열의 문인들을 색출·검거하기 시작하자, 평소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임화, 이원조 등 조선문학가동맹 회원들과 함께 1948년 월북한다. 월북 후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한국문학사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사이에 임화 등과 함께 숙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엮은이
이성천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에 강원도 춘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문학 수업에 입문한다. 대학 시절에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둔한 학생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의 야만적인 폭력과, 폭압적 현실에 저항하며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꿈’이 공존하던 시대임에도 동시대의 현실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는 강의실에 머무르며 시를 습작하거나 문학과 철학 책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문학의 본질과 비평의 윤리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부분에 당선된 <알리바바의 서사, 혹은 소설의 알리바이>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시대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조명해 본 글이다. 박사 학위논문인 <황동규 시의 존재론적 의미 연구-하이데거의 존재사유를 중심으로> 역시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기획되었다.
이후에는 ≪시, 말의 부도(浮圖)≫, ≪한국 현대소설의 숨결≫, ≪작품으로 읽는 북한문학의 변화와 전망≫, ≪한국 소설의 얼굴≫(전 18권) 등의 저서와 공·편저를 출간했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거쳐, 계간 ≪시와 시학≫, ≪시에≫ 등의 문예지에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연기(煙氣)
상자
고향(故鄕)
향기(香氣)
명상(瞑想)
소년(少年)과 기생(妓生)
소년(少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러나 나는 최근 아버님의 문필(文筆)에 대하야 완전히 고개를 숙이고 만 일을 당하였다. 이 어른이 젊어서 한시(漢詩)를 많이 지은 것과 나종 서울에 오셔서 ≪야뢰(夜雷)≫라는 잡지(雜誌)를 창간하시어 조선서는 제일 먼저 잡지 사업을 시작하셨다는 것도 일즉 차상찬(車相瓚) 선생께 들어 알고 있었던 일이요 여운형(呂運亨) 선생께 인사를 갔다가 아버님의 저서에 ≪연설법방(演說法方)≫이라는 책 있는대 전에 애독하야 마지않었다는 말슴도 즉접 들어 모르는 배 아니지만 ≪동물회의록(動物會議錄)≫이라는 어버님의 책이 이십오 년 전에 사만 부를 돌파하야 아직도 조선 출판계(出版界)의 최고 기록(最高記錄)이라는 것을 알고는 망연자실하여 있었다.
이것은 박문서관(博文書館) 노익형(盧益亨) 씨의 말로 어느 신문의 기사에서 읽은 것인대 현재의 나와 비슷한 년대로 하물며 이십오 년의 옛날에 사만 부식을 팔리게 하는 실력을 내셨거늘 내 아무리 신문학(新文學)이니 뭐니 떠들어도 부끄러움이 많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오늘날의 나의 무력함을 돌아보건대 어렸을 적의 것일망정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나의 작문이 아버님께 푸대접을 당하게 된 것도 미루어 알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아버님께서는 또 소설도 쓰셨다. 아직도 내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마는 ≪발섭기(跋涉記)≫니 ≪됴염라젼≫이니 전혀 우리 어머님 한 분을 독자(讀者)로 하야 읽고 심심해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야기책을 지어 주셨다. 그때 나도 그것을 읽어 봤으며 재미있다고 동내 부인네들이 여기서 저기서 빌려 가더니 나종에는 그냥 글자 하나 못 알아보게 떨어지고 말었던 것이다.